175. 가로등

175. 오늘도 그들은 하늘 한 번 올려다 보지 못하고 누군가를 위해 숨죽여 살아내고 있다. / 가로등

174. 가을


꽃잎엔 새하얀 새벽 이슬 그대론데  
어쩐지 붉게 물든 물봉선 

순진한 새우소년 그녀 입술 닿으려니 수줍게 볼 붉히고 
저녁 하늘도 덩달아 부끄러 어쩔 줄 모르네 

투명하게 붉어지는 계절 
그래 나도 어쩐지 아름답게 익을 것 같네 

잔뜩 성 난 어린 소녀 빨간 볼때기 
조심스레 그대 숨결 불어와, 연분홍 풍선 되어 피어 오르네 

어쩐지 아름다운 
그런 계절이 왔네 

173. 수퍼 강대국

자, 내 주위를 꽁꽁 얼려 담을 쌓자  
아무도 못 들어오게 벙커를 지은 다음   
벙커의 암호를 알아내는 특전사에게만 우주적으로 영광스런 상장을 주자  

뭐  
아무도 못 푼다고 하면, 나는 더욱더 슈퍼 히어로가 될 테고  

그와 관계없이  
좀 더 견고한 암호 같은 건 만들 수 없는 걸까 찾을 수 없는 걸까  

스스로가 갇혀 못 나오도록   
나오고 싶어도 못 나오도록 옥죌 수는 없을까  

태초에 입력된 암호를 찾아줘요

172. 구인공고

구인합니다 세상에 찌들지 않은 사람 우리만의 언어로 함께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 사회화 덜 된 원시인 같은 사람 우리 둘이 발가벗고 순수 그 자체로도 살아갈 수 있는 사람 우리의 우주를 새로이 지을 수 있는 사람을 찾습니다

171. 우산은 다시 정처 없고

무례하기는

겨우 인간으로 살면서, 우산 따위

당신의 사랑 앞에 쏟아지는 우주 아래

왜 하나의 우산으로 걸어야 할까

 

글자에 갇혀 질식한 우주

어항 속에 조난당한 금붕어 한 마리 마냥

 

다시 원시인이 될 순 없을까 광화문 한복판의 보름달처럼

정처없는 알몸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나그네처럼

 

얼마나 젖으면 사랑할 수 있을까

얼마나 부끄러우면 다시 우주와 하나될 수 있을까

 

빗소리가 달아오른 날,

찢어진 책은 강물에 흘러 바다로 조각났다

가끔씩 소금기 묻은 순수의 조각들이 물어물어 나를 찾아왔지만 나는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뒤돌아 뚜벅뚜벅, 우산은 다시 정처 없고

 

170. 오감 과제

1. 조간신문-자존심 2. 색연필-신디사이저 3. 비누향기-뽀뽀 4. 헤드폰-노숙자의 신문지 5. 미니스커트-공연

6. 악플-화살 7. 한여름의 크리스마스캐롤-냉면은 겨울 음식 8. 염주-부채 9. 달빛-충전기 10. 우산-고정관념

11. 라디오-사진앨범 12. 보내지 못한 편지-메아리 13. 편집증-벙커 14. 아기 눈망울-아침 이슬 15. 색종이 세트-실로폰

16. 프랭클린플래너-철창살 17. 골무-나무그늘 18. 피멍-잔향-리버브(Reverb)-물둘레 19. 자존심-장미 가시 20. 달력-아파트

21. 갑자기 맞는 밤 공기-불합격 전화 22. 보드카 샷-뺨 맞은 얼굴 23. 아기 피부-소녀의 마음 24. 달빛-빵 굽는 냄새 25. 주먹밥-어미 새가 품고 있는 알

26. 오페라-샹들리에 27. 폭염-면접-사우나 28. 매끈한 피부-입에 넣자마자 녹아없어지는 생선회 29. 메탈 사운드-더운 날 몰아치는 소나기 30. 이별 노래-드라이한 레드와인

169. 시계

바닥에 다다르니 가까이에 들리는 건 추락한 탁상시계 초침소리, 똑 딱 똑 딱, 솔 라 솔 라, 장조 단조 장조 단조. 기쁨, 슬픔, 기쁨, 슬픔. 정수리 가까이에 울린다 쉬지 않고 일 초마다 / 시계

168. <나비>

<나비> 

바람 부는 날이면 
나무에 초록색 나비 앉았다 

어떤 놈은 무심히 앉아 쉬는 듯 
또 어떤 놈은 그저 간신히 매달려 버티며 
푸르른 풀잎 소리의 날갯짓 

비라도 내리면  
언 놈은 가끔 죽어 버렸다 
저승에도 초록 물고기 싹텄다 

덕분에 나는 언제나 봄이었다 

나도 푸르게 죽었으면 좋겠다 
흠뻑 젖어 죽었으면 좋겠다 

풀 속 어딘가 생명 잃은 우산 하나 
그렇게 인생이 되었다

167. 복권

나를 기어이 다 벗겨 놓고선 당신 표정, 비로소 내 실체를 알게 된 당신 그 표정 겁이 났다. 기대와 관심의 손길도 사실 내겐 두려움, 실망의 상처만 남기고 돌아서면 어쩌나. 나도 얼마나 해낼 수 있을지 잘은 모른단 말야. / 복권

166. 소금

되는 것 하나 없이 매일같이 물만 먹었다. 지고가는 삶,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 소금